2010. 6. 21.

[IT] @issuetoday 알고리즘 공개

"우리는 이슈를 숨기지 않습니다"

1. issue today란?

issue today는 트위터에서 실시간 검색 순위같은 핵심 키워드를 알려주면 어떨까하는 아이디어에 시작된 순수 개인 프로젝트입니다. 시간이 바뀌면 사람이 바뀌고.. 제가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물론 있겠으나... 현재로서는 순수합니다. 때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언론이 가끔 이슈를 숨기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누구나 떠드는데 조용히 하고 있는
언론을 보고 이런 통계가 매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issue today, issue now는 모두 이러한 중앙 집권적이 아닌 social news를 지향합니다.
모두가 이야기하면 그것은 이슈가 됩니다. 그리고 이 로봇은 이슈를 숨기지 않습니다.

2. 이 문서를 작성한 이유는?

issue today 통계 산출 방법을 밝히고, 이와 유사한 트위터 API를 통한 로봇 제작에 보탬이 될까 해서!


3. 통계 방법은?

a. http://twittercounter.com/pages/country%26time_zone=Seoul 에서 제공되는 정보를 통해 팔로워 상위 1000명을 모두 팔로잉했습니다. 딱 1000명은 아니지만, 거의 1000명입니다. issuetoday 계정이 이 분들을 팔로잉 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렇게만 팔로우하니, 맞팔을 약 300분이 해주시더군요. 매너도 다들 좋으세요.

툴을 짜서 할까 하다가, 그냥 손으로 다 팔로잉 했다는...


b. 이 계정의 타임라인을 1시간 간격으로 저장합니다.

팔로잉하는 사람 수가 많으면 API 호출로 가져올 수 있는 과거치 분량이 제한되는 현상이 있습니다. 아마 1000명이 넘으면 더 짧은 시간 밖에 못가져올겁니다. 과거치를 계속해서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을 아시는 분!

(twitter4j 라이브러리를 사용했음을 밝힙니다.)

c. 하루 두번(오전/오후 5시 반) 최근 24시간치 자료를 모두 로딩해서 통계내어 트윗합니다. 출근 전, 퇴근 전 각각 트윗한다는 느낌으로 내어놓습니다.

이때!!

가. 모든 트윗 단어들은 분할됩니다. 공백과 특수 문자 등 일정 기준으로 단어 단위로 모두 분할합니다. @issuetoday, #태그, http://url 등이 분리되어 나옵니다.

나. 한글 조사와 명사를 분리합니다. "한국이" 라고 하면, 뒤 '이'를 떼어내고 한 단어를 만듭니다. 최종 통계에는 한국, 한국이 두개가 각각 카운트 되지만, 한국을/한국은 등 때문에 결국 '한국'이 빈도수가 더 높아지는 효과가 생겨서 자연스레 명사를 걸러냅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정가은" 의 경우 "정가"와 "정가은"으로 분할되기도 합니다...-.-.. 이런 형태소 분할은 사실 어려운 문제라, 대강 일단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다. 멘션은 멘션(@issuetoday 형태)대로, 태그는 태그대로 따로 모읍니다.

라. URL은 통째로 한 단어가 됩니다.

마. 상투어를 제외합니다. 트위터, 트윗, 팔로우, your, my, this 이런 상투적인 명사들을 제외합니다. 이건 리스트화되어있고 언제든지 변경이 가능합니다. 이거 작성하느라고 초반에 허리좀 휘었습니다. 다만, 보통명사도 중요한 키워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가급적 방해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습니다.

참고로 트위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RT", "감사합니다" 입니다. 따라서 키워드로서 의미를 지니지 않는 이런 단어들은 필터링합니다.

d. 일주일에 한번 일요일 오전에는 일주일간 통계를 발표합니다.

e. 매월 1일에는 한달간 통계를 발표합니다.




4. 오해를 풀어야 하는 부분!

a. 이 통계는 상위 트위터 유저(팔로워수 기준) 1000명입니다. 그것도 팔로잉 하는 계정에서 보이는 타임라인이기 때문에 전수 검사는 아닙니다. 따라서 멘션이나 태그 등은 샘플 추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너무 등수에 집착하지 마세요. 트렌드를 본다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b. 이 통계는 팔로잉하는 계정에서 보이는 타임라인이기 때문에 상위 트위터 유저 분들이 트윗하거나 RT한 것만 대상으로 하게 됩니다. 1000명을 벗어나서 하는 대화는 대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원래는 1000명이 작성한 모든 트윗에 대해서 하려고 했습니다만, 이러려면 1000번이 넘는 API 호출이 필요해서 트위터 1시간 150번 API 호출 제한에 걸리게 됩니다.

원래 이렇게 기획했다가 사실 포기했다고 강력히 항변하고 싶습니다..--+

5. 운영은 그리고 다른건?

a. 현재는 가정용 PC로 이 로봇을 구동하고 있습니다.... 전기세라도 뽑으려고 협찬을 받아볼까 주제넘은 혼자만의 고민(?)을 해봤습니다만 당분간 이상태일것 같군요. 다만 구글앱엔진으로 입주할 수 있지 않을까 알아보고 있습니다. 파일 처리 구조를 제거하면 가능할것도 같습니다.

b. 소스 공개는 사실 부끄러워서 못하고 있습니다. 관련된 문의는 트위터로 주세요~. @issuetoday는 로봇이지만, 가끔 사람 말도 합니다.

c. 기타 다른 의견은 모두 @issuetoday로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처음 의도와는 달리, 많은 분들이 등수에 집착하시기도 합니다. 이건 계획에 없던 것인데..-.- 모쪼록 트렌드를 봐주십사 다시한번 부탁드립니다.

e. 이 어려운 문서를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

2010. 6. 2.

우리집 손목 시계 이야기

내 가장 오래된 시계 친구..고등학교 졸업때 막내 삼촌이 사주셨었다. 당시 백화점에 가서 샀었다..-.-.. 배터리를 4번도 넘게 바꾼것 같다. 시계방에 갔더니 이런 시계는 배터리만 제때 잘 갈아주면(누수가 없게) 상당히 오래 쓸 수 있단다. 지금도 막일할땐 차고 나간다..



기계식 시계를 공부하고 나서 처음 산 나의 스켈레톤 무브먼트 시계 옥션에 가면 2만원이 안되게 살 수 있다. 무브먼트를 보고 있노라면..시간 가는줄 모른다. 혹시나 해서 아래 mov 파일을 첨부한다(아이폰에서는 클릭하면 동영상을 바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실제 무브먼트 돌아가는 mov 파일




이것은 2004년도에, 와이프에게(당시는 여자친구!) 선물했던 세이코 시계, 나리타공항(맞나?하네다였나?) 면세점에 들러 큰맘먹고 샀었다. 그때는 스와치가 이 세상 시계의 전부인줄 알았는데.. 당시 주영이(대학원 동기!)가 세이코라는 좋은 시계가 있다며 알려주었었다!



이건 예물시계.. 내가 직접 고르겠다며, 회사 최선배님께서 찍어주신 세이코 시계. 아직도 너무 마음에 든다. 구매하고 난 후 지금까지도(2008년 이후) 한번 5분 빠르게 맞추어놓은 후 배터리를 교체한 적도 시간을 바꾼 적도 없다.



이건 내가 고르겠다니까... 자기도 고르겠다고 하며, 산 와이프의 예물 시계.. 국내에 파는 데가 많지 않아서, 어디선가 주문해서 산 Tissot 시계.

집에 있는 태양전지 + 모터 연결

작년에 태양전지 모듈을 구매했다.

17V 0.3A로 약 5W 규모 1년내내 작동시켜도 하루 4시간 기준(원래 흐린날씨 등을 감안해 1년 기준으로 하루평균 4시간 발전이 기본 가정임) 4 * 365 * 5 = 7.3kWh 가 나온다...

1kWh가 가정용 약 120원임을 가정하면.. .

1년에 내가 벌 수 있는 돈은 876원..

이걸 20년동안 켜놓는다고 하면 17,520원이다..

하지만 난 이 태양전지 모듈을..25,000원 정도에 샀다..

이것이 현실적인 태양전지의 현재 경제성!

한 1년간 Green IT, 신재생 에너지 조금 공부해 보았는데..

아직 신재생 에너지 갈 길은 멀다.

사진 :


동영상 : 아이폰으로 녹화해서 MOV임

게임의 역사 - 1997.06 기고글

1997년 6월호 컴퓨터 게임이라는 당시 국내 잡지사에 실렸던 내 글이다.



케텔 게임오락동호회(게오동?)에 올렸던 글을 보고 잡지사에서 연락이 와서 실렸던, 당시는 뿌듯한



그런 글이었나. 뭔가 글을 올리면 이렇게 스카웃도 당하는구나..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이 글이 이제 사료(?)가 된다. 옛날 생각 하면서 한번 읽어보시라!



알싸한 향수의 게임 장면을 볼 수 있다!



P.S. 저작권에 문제가 없는지 모르겠지만, 이 잡지사는 이미 망했다..-.-..
저작권 의뢰를 할 데가 없으니, 일단 게시하지만, 꼭 연락해달라. 곧바로 상응하는
조치를 수행할 예정이다.





역사서설, 이븐 할둔

2010/01/24

이 책이 즐거운 이유는, 이슬람의 역사가 이븐할둔이 이 책을 쓴 시기가 1377년경이라는 점이다.



지금과 약 630년의 간극이 있는 이 책에는, 그 당시의 최첨단이 담겨져 있는데, 그 중에는 놀라울 정도로

오늘날에도 유용하며, 어떤 면에서는 미신적이다.



20년을 한 세대로 잡으면 약 31세대 정도가 지났을때 우리의 생각은 어떻게 변화했으며, 그리고 어떤 지식들은 여전히 유효한가라는 관점에서 흥미로운 책이다.



몇가지 재미있는 문구들을 소개한다.



1.

무슬림이 페르시아를 정복했을때,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유명한 도서관을 파괴하라고 지시한 것과 관련된 설화



"사아드 이븐 아비 와카스는 우마르 이븐 알 하탑에게 그것을 전리품으로 무슬림에게 나누어줄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그것들을 모두 강물에 던져버리라, 만약 거기에 담긴 내용이 올바른 인도라면, 신께서 우리에게 더 훌륭한 인도를 주실 것이다. 만약 거기에 담긴 내용이 그릇된 것이라면, 신께서 우리를 그것들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다'"



2.

두려움이 많거나 소극적인 사람, 나아가서 법정에 미칠만한 영향력이 없는 사람(정치적 영향력)은 상업을 하지 말아야 한다.



3.

지위를 바라고 얻으려는 사람은 유력자나 군주의 요구에 따라서 아양을 떨고 아부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아무런 지위도 얻지 못할 것이다.



자존심이 강하고 오만한 사람들은 지위를 무시하므로 가난과 궁핍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자기 기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들이 그가 소유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그들에 대해서 일종의 우월감을 느낀다. 군주나 유명한 학자 혹은 어떤 방면에서 대가로 알려진 사람을 조상으로 둔 귀족 자제들 역시 이러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기보다 우월한 힘에 의해서 강제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의 완벽성과 우월성을 인정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데, 이와 같은 강제력과 우월한 힘은 지위에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오만한 사람이 아무런 지워도 없으면 사람들은 그의 오만함을 미워하게 되고 눈꼽만큼의 친절도 베풀지 않는다. 그는 자기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므로, 아무런 지위도 얻지 못하게 된다.



4. (요약)



하인의 네가지 분류. 믿을만하고 능력있거나, 믿지 못하지만 능력있거나, 믿을만하지만 능력이 없거나, 둘다 없는 것..

첫번째 유형은 데리고 있기 힘들고 독립하려고 하고, 결국은 믿지 못하지만 능력있는 하인을 두고 최대한 경계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그게 리더의 팔자다..



5.



도회문화(도시문화)를 타락시키는 것들 가운데 사치의 만연으로 인한 쾌락에의 경도와 탐님도 꼽을 수 있다. 그것은 맛난 음식과 음료를 추구하는 욕망을 다양화시키고, 이는 다시 다양한 바업의 성교, 예를 들면 간음이나 동성애와 같은 방식을 통한 성적 쾌락의 다양화로 이어지며, 그것은 종의 소멸을 가져온다....



6. (요약)



굶는 것을 치료로 여기는 풍습들..



7. (요약)



도시의 탄생과 소멸이 특정 사이클을 이루며, 피할 수 없다는 하는 점

독재 회귀의 법칙

2009/09/20

선량하고 의욕적이고 개혁적인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그러한 것을 성취하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 의지는 확고했다.



그래서 드디어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타협과 설득을 통해 자신이 그리는 세상의 정당성을 말하고 그리고 지금은 고통스럽더라도 장기적으로 그것이 가져다줄 희망을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들은 동물적이며 자신의 이익이 침해받는다고 생각하면 곧 상대편의 약점을 잡아내고 물어뜯는다. 결국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자기 편에 서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점점 나뉘게 될 것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너무나 뒤틀린 관점을 가지고 있고

그를 설득하기 전에 우리는 관점부터 조율해야 하는 기나긴 게임을 해야하며 그 게임이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지도자는 드디어 강요를 시작한다. 그곳에는 엘리티시즘이 숨어있다. 내가 똑똑하고 맞고 당신의 말은 그럴듯하지만 너무 단기에 치중한다는 것이다. 내 것의 가치가 더 크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쪽은 탄압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쪽을 몰아붙이기 시작하면,



효과적으로 몰아붙이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 존재한다. 우리의 독재 정부가 매우 자주 쓰던 그 방법들.. 언론 통제, 협박 등 나쁜 의도로 그것을 행하던 사람들이 길고긴 시간 최적으로 연구한 그 방법론들을 가져다가 쓰게 된다. 그것들은 나름 효과가 좋다.





그래서 어떤 선한 지도자이건 독재로 회귀하기 쉽다. 세상은 복잡하며 설득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것이 더 큰 단체일 수록 설득할 대상은 무궁무진해진다.



그럴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곧바로 독재다.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또다른 독재를 펼칠 수 밖에 없다던 크리슈 나무르티의 말이 그래서

설득력있게 들린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크리슈 나무르티

2009/09/12

인류는 특별히 생각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게 만드는 철저한 습성인 동물적 본성에서 시작해서는,
마침내 그것을 뛰어넘는 이성을 갖추게 되었지만,
여전히 본성은 이성을 압도하고 있다.

얼마나 압도당하고 있던지, 본성을 자각하여, 그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수한
이성적 존재란, 인류에게 거의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심지어 그것을 알기 시작한 나도 도저히 그게 불가능해보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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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죄다 인용이다. 반 밖에 아직 안읽었는데 이런 놀라운 혜안이 들어있다!




동물은 쓰다듬어 주는 한 훌륭하게 반응하지만,
적대적인 도발을 당하는 순간 그의 본성의 모든 포악함이 드러난다.


만일 내가 항상 너와 대비해서 저울질하고, 너와 같이 되려고 싸운다면, 나는 내가 나
자신임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하나의 환영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어떤 형태의
비교이든지 간에 그것은 더 큰 망상과 더 큰 불행으로 이끌 뿐이라는 점을 이해했을 때, 다시
말해서 마치 내가 나 자신을 분석하고, 자신에 대한 지식을 조금씩 조금씩 보태고, 혹은 나와
나 바깥의 어떤 것-그것이 국가이든 구세주이든 아니면 이데올로기이든-을 동일시할 때,
그리고 그러한 모든 과정이 오직 더 큰 순응과 따라서 더 큰 갈등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알 때,
나는 그것(비교)을 완전히 버리게 된다.


우리는 모두 이런 형태 혹은 저런 형태의 쾌락을 좇고 있다-지적, 감각적 혹은 문화적 쾌락,
개선의 쾌락, 다른 사람에게 해야 할 것을 말하고, 사회악을 고치고, 좋은 일을 하는 쾌락-더
많은 지식의 쾌락, 더 큰 물질적(육체적) 만족, 더 많은 체험, 삶에 대한 더 많은 이해, 마음의
여러 똑똑하고 영악한 것들-그리고 궁극적인 쾌락은 물론 신을 갖는 것이다.
쾌락은 사회의 구조이다. 어렸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은밀하게, 교묘하게, 또는
드러내 놓고 쾌락을 좇는다.



그렇다면 왜 삶이 쾌락에 의해 이끌려서는 안되느냐고 물을는지 모른다. 그것은 쾌락이 반드시
고통, 좌절, 슬픔과 공포를 가져오고 공포는 폭력을 낳는다는 아주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살고 싶으면, 그렇게 살라. 어떻든 대부분의 세상이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러나
당신이 슬픔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쾌락의 전구조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쾌락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비난하지 않고,
나쁘다거나 좋다고 말하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추구한다면, 눈을 뜨고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즉 항상 쾌락을 찾는 마음은 반드시 그것의 그림자인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 추구하자는 얘기다. 비록 우리가 쾌락을 좇고 고통을 피하려 한다고
하더라도, 그 둘은 떨어질 수 없다


말하자면 승려나 고행자처럼 그걸 끊지 말고, 그게 죄라고 생각하여
여자를 쳐다보지 않으므로써 그들의 이해의 활력을 파괴하는 일은 하지 말고, 쾌락의 전의미를
알 일이다. 그러면 당신은 삶 속에 엄청난 기쁨을 갖게 될 것이다. 당신은 기쁨에 관해 생각할
수 없다. 기쁨은 즉각적인 것이며, 그리고 그걸 생각함으로써 당신은 그걸 쾌락이 되게 한다.
현재에 산다는 것은 아름다움의 즉각적 지각이며, 그것으로부터 쾌락을 찾는 일 없이 그 속에
있는 커다란 기쁨이다.


우리는 언제나 단상에 앉지 않으면 안된다. 속으로 우리는 불행과 비참의
소용돌이이며 그렇기 때문에 바깥으로 대단한 인물로 여겨지는 것은 아주 만족스러운 일이다.
이 지위, 위세, 권력을 얻으려는 갈망, 사회에 의해 뛰어난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갈망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은 바램이며, 이 지배에의 욕구는 공격의 한 형태이다. 자기의
성자다움에 비추어 어떤 지위를 찾는 성자는 농가의 마당에서 부리로 쪼고 있는 닭과
마찬가지로 공격적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공포를 아는가-직업을 잃는 것에 대한 공포, 충분한
음식과 돈을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 이웃과 대중이 당신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성공 못하면 어쩌나, 사회에서의 지위를 잃으면 어쩌나, 조롱당하고 경멸당하면
어쩌나-고통과 병에 대한 공포, 지배에 대한, 사랑이 무언지 모르거나 사랑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내나 아이들을 잃는 것에 대한, 죽음에 대한, 죽음과도 같은 세상에서 사는 것에
대한, 지독한 권태에 대한,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 갖고 있는 이미지에 따라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당신의 신앙을 잃는 것에 대한 공포-이 모든 것과 그외의 수많은
공포들-당신은 당신 자신만의 공포를 아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들 공포에 관해 흔히 무엇을
하는가? 그것들로부터 도망치거나-그렇지 않은가-그것들을 은폐하기 위한 관념들과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않는가? 그러나 공포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그것을 증가시키는 것일 따름이다



확실한 것으로부터 불확실한 것에로 가는 운동이 내가 말하는 공포이다.
내가 여기 앉아 있는 지금 이 순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나는 현재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아무 일도 나에게 일어나지 않고 있고, 아무도 나를 위협하지 않으며 나에게서 뭔가를
빼앗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너머에는 마음의 심층이 있어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장차 일어날 일을 생각하고 있는 또 과거의 어떤 것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과거와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것과 즉각적으로 마주칠 때 거기엔 공포가 없다. 생각이 스며들 때에만 공포가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질문은, 마음이 완전히, 전적으로 현재에 살 수 있는가? 이다. 그것은
공포가 없는 마음에게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려면 당신은 사고, 기억, 시간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걸 이해하는데 있어서 머리로만, 말로만 이해하지 않고
가슴으로, 마음으로, 내장으로 이해할 때, 당신은 공포로부터 자유로와질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마음은 공포를 낳는 법 없이 생각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그걸(공포를) 해소하려 함이 없이, 그것의 반대 즉 용기를 끌어들이는
일 없이 당신의 공포를 볼 수 있는가? 당신이 <나는 그걸 제어해야 해, 나는 그걸 없애야
해, 나는 그걸 이해해야 해>라고 말하면, 당신은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구름, 나무 혹은 강의 움직임들을-이것들이 당신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아주 조용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당신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그 요구들이
아주 실질적이고, 그 반응이 아주 빠르기 때문에 한결 어렵다.


그러면 우리 속에 있는 모든 형태의 폭력이 완전히 없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이 괴물스럽게
잔인한 세계에서 여전히 살 수 있는지를 같이 생각해 보자. 나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속에 증오, 질투, 불안 또는 공포의 숨결을 갖고 있고 싶지 않다. 이것은 내가 죽고
싶다는 걸 뜻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도 충만하고 풍요하고, 아름다운 이 놀라운 지구 위에서
살고 싶다. 나는 나무, 꽃, 강, 초원, 여자, 소년 소녀들을 보고 싶으며, 동시에 나 자신과
더불어, 세계와 더불어 완전히 평화롭게 살고 싶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만일 우리가 폭력-전쟁, 강탈, 국가적 적대와 계층간의 갈등 등 사회의 외적 폭력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폭력을 보는 법을 안다면, 우리는 그걸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복잡한 문제가 있다. 여러 세기 동안 인간은 폭력적이었다. 세계 어디서나 종교는
그를 길들이려고 했으나 어떤 종교도 성공하지 못했다.


당신이 자신을 인도인이라거나 유럽인이라거나, 혹은 그 어떤 것으로 부를 때 당신은
폭력적이다. 그게 왜 폭력적인지 아는가? 당신이 자신을 그 외의 모든 인류로부터 분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스스로를 신념, 국적, 전통에 의해 분리할 때, 그것은 폭력을 키운다.
그러므로 폭력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날, 어떤 종교, 어떤 정당이나 편파적 조직에도
속해 있지 않다-그는 인류에 대한 전적인 이해에 관심이 있다.


내 피부가 검든 누렇든 희든 자줏빛이든지간에, 한 폭력적 인간인
내가 여기 있다. 나는 이 폭력이 타고 난 것인지 아니면 사회가 내 속에 심어준 것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내 관심의 전부는 다름 아니라 도대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 이상 나에게 중요한 건 없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섹스, 음식, 지위보다 더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건 나를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폭력은 나를 파괴하고 세계를 파괴하며, 그리고 나는 그걸 이해하고 싶고 그걸 넘어서고 싶다.


이러한 이미지들에 기초한 관계는 관계 속에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미지는
허구적인 것이기 때문이며 사람은 추상 속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하고 있는 건 이것이다-즉 관념 속에서, 이론 속에서, 상징 속에서 살고 있으며, 우리가 우리
자신과 남들에 관해 만들어낸-따라서 전혀 실재가 아닌-이미지들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모든 관계는, 그것이 재산과의 관계이든 아니면 관념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이든, 근본적으로 이
이미지 형성에 근거해 있으며, 따라서 거기엔 언제나 갈등이 있다.


나는 우리가 이 질문 속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의식의 어느 구석도 갈등으로 물들지 않은 데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관계-그것이 친한
사람과의 관계이든 아니면 이웃이나 사회와의 관계이든-속에는 이 갈등이 있다. 즉 반대, 분열
상태, 분리, 이중성 등의 갈등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사회에 대한 관계를 관찰해 보면 우리는
우리 존재의 모든 차원에 갈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즉 아주 피상적인 대응이나 아니면
황폐한 결과를 가져오는 크고 작은 갈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어떤 것과 비교하고 있다-즉 더 돈 많고 더 훌륭한 사람,
더 머리 좋은 사람, 더 애정 깊고, 더 유명하고, 더 이렇고 더 저렇고... 그 <더>라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을 항상 어떤 것 혹은
어떤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갈등의 주요 원인중의 하나이다.
그러면 도대체 비교라는 건 왜 있는가? 왜 당신은 당신 자신과 다른 것과를 비교하는가?
비교는 어린 시절부터 가르쳐져 왔다. 모든 학교에서 A는 B와 비교되었고, A는 B처럼 되기
위해 그 자신을 파괴했다.

모든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젊은이들은 사회에 저항하며, 그것은 그것 자체로서
좋은 거지만, 그러나 저항은 자유가 아닌데, 왜냐하면 당신이 저항할 때 그것은 하나의
대응이고, 이 대응은 그것 자체의 패턴을 세우며, 그리하여 당신은 그 패턴에 붙잡혀 있는 게
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것이 뭔가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다른 틀 속의 낡은 것이다. 어떤 사회적, 정치적 저항도 결국 무척 낡은 부르좌의 정신상태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당신은 기억으로 가득차고, 제약 투성이이며, 어제의 투덜거림으로 꽉차 있기 때문에 결코
고독하지 않다-당신의 마음은 그것이 축적해온 쓰레기를 깨끗이 비우지 않은 것이다.
고독하려면 당신은 과거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안된다. 당신이 고독할 때, 즉 어떤 가족에도
속해 있지 않고 어떤 나라에도 문화에도, 특별한 대륙에도 속해 있지 않고 완전히 고독할 때,
국외자가 된 느낌이 있게 된다. 이렇게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천진하며, 이 천진성이 마음을
슬픔으로부터 해방한다.


배운다는 것은 시간의 문제인가? 우리는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서로 증오하고 죽이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의 길이 있다는 걸 배우지 못했다.

우리는 산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며, 따라서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모른다, 우리가 삶을 두려워하는 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완전히 불안전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는 안전이 없다는 걸 내적으로, 심리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안전이
없으면 끝없는 운동이 있으며 그래서 삶과 죽음은 같은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 말은 짊어진 게 너무 많고 너무 썩어서 나는 그 말을
선뜻 사용하고 싶지가 않다. 모든 사람이 사랑을 말한다-모든 잡지와 신문 그리고 모든
선교사가 끊임없이 사랑을 말한다. 나는 내 나라를 사랑하고, 나는 나의 왕을 사랑하고, 나는
어떤 책을 사랑하고, 나는 재산을 사랑하고, 나는 쾌락을 사랑하고,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하고,
나는 신을 사랑한다. 사랑은 관념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 좋을대로 기르고, 키우고,
품고, 난폭하게 취급되고, 뒤틀려질 수 있다. 당신이 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상상력을 보호한다는 걸 뜻하며, 당신이 고상하고
신성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의거한 어떤 형태의 존경할 만함을 걸치고 있는 당신 자신을
보호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나는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완전한 넌센스다. 당신이 신을
경배할 때 당신은 자기 자신을 경배하고 있는 것이며-그리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세계 어디에서나, 이른바 신성한 사람들은, 여자를 쳐다보는 것은 완전히 나쁠 것이라는
주장을 견재해왔다. 그들은 만일 당신이 성에 탐닉하면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고 말하며,
그래서 그들은 비록 자기들이 그것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제쳐 놓는다. 그러나
성욕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두 눈을 빼버리고 그들의 혀를 잘라버리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가슴과 마음을 굶주리게
하고 쇠약하게 했다. 그들은 인간을 탈수시켰다. 그들은 아름다움이 여자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인멸했다.

내가 <사랑은 내일도 어제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거나 <아무 중심이 없을 때 사랑이
있다>고 할 때, 그 말은 나에게는 정말이지만 당신에게는 그렇지 않다. 당신은 그걸 인용하고
그걸 어떤 공식으로 만들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타당성이 없다. 당신은 스스로를 위해
그것을 알아야 하며,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보는 자유, 모든 비난, 모든 판단, 모든 동의와
반대로부터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보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중의 하나이며-또는 듣는 것도 그렇다-보는
것과 듣는 것은 같은 것이다. 만일 당신의 눈이 근심걱정으로 눈멀어 있다면, 당신은 황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연과의 접촉을 잃었다. 문명은 점점 대도시를 향해
가고 있다-우리는 점점 더 도시인이 되어 가고 있고, 밀집한 아파트촌에서 살고 있으며, 저녁
하늘이나 아침 하늘을 바라볼 공간조차도 거의 갖고 있지 못하고, 따라서 우리는 상당한
아름다움과의 접촉을 잃고 있다. 우리가 해뜨는 거나 해지는 것, 달빛, 혹은 물 위의 빛의
반사를 얼마나 못 보고 있는가에 대해 당신이 주목해 본 적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역사책을 좋아한다

2009/09/12

사실 역사는 충분히 인간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듣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다. 많은 기록들이 너무나 많은 것들을 말해주고 있다. 기원전 몇 천년 전부터 지금까지, 많은 위대한 이들이 우리가 기억해야만 할것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며 격정적인 순간들이 지나갔다. 피로 물들었던 순간도 있고

억울함에 치를 떠는 시기도 있고, 너무나 기발해서 소름이 돋는 발견도 있고,

그런 일들을 한번 뒤튼 것도 있다. 희노애락과 낯설음의 장이 있었다.

그리고 반복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과거의 소리들을 듣는 것은 매우 제한된 사람들

뿐이다.


우리는 다시금 처음부터 그것들을 시행착오 속에 반복한다. 유전자 코드에 박힌대로,

복잡한 상호작용을 거쳐서 그러한 갈등을 다시 만들어내고, 그러한 실수를 반복한다.


이러한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당연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뭐 알아도 별 수 있냐만, 그래도 맨바닥 보다는 나을텐데 말이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역사에 대해서 또한 유감이다.

새로 만들 것처럼 미래를 바라보라

2009/08/09

"새로 만들것처럼 미래를 바라보라"

IT기업의 사람들에게는 늘상 미래를 예측하기를 강요당하며, 따라서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추궁받는다.

그러나 늘상 아이디어는 너무 일찍 나오거나 너무 늦었거나, 나중에 생각보면 방향이 뒤틀렸었다. 이는 세상이 전개되어 가는 과정이, 유저가 적응성을 갖는 과정이 생각보다 복잡하기 때문에, 그 방향성을 정확히 맞추기 어렵다.

어떤 회사를 창업을 하던, 특정 서비스를 처음 생각대로 그대로 밀고 나가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인 경우가 많다. 어떤 서비스든 변화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고객을 만족시키기는 매우 힘들다. 아이디어는 늘상 불완전한 상태로 태어나기 나름이다. 그것은 시장의 괴물같은 틀에 한번도 끼워맞춰진적이 없기 때문에 열심히 다듬고 타이밍도 잘 맞추어야만 꼭 들어맞을 수 있다.

내가 낸 아이디어가 정말 잘 될거라고 모두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만큼 세상은 어떤 흐름을 밟아서 변화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고 이 과정은 매우 다양한 것들의 상호작용이다. 그 과정은 상당히 '혼란'스럽고, 인간은

그것을 예측하기에 상당히 부적합한 허황된 긍정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러한 조심스러움과는 또 별도로 그러나 너무 현재 상황에 묶여서 제대로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만약에 이러한 인프라를 가지고 전부다 새로 시작했다면? 유선전화 같은것은 존재하지도 않고, 무선단말과 인터넷 인프라가 있는 세상이었다면? 규제가 없는 세상이었다면?

이렇게 상상해보는 것은 미래에 대해 좀더 열린 마음으로 대하게 해준다. 그리고 대부분 여러가지 절차를 거치고 시간은 좀더 걸리는 것이 일상적이겠지만, 희망에 찬 미래를 그리면 또 그 방향대로 나가는게 세상 아닐까?

두가지가 조금은 충돌하는 생각같지만, 둘다 이해해야만, 바로 미래를 보고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지 않나 싶다.

Sail On Chaos?

우리는 기억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
아주 낯선 것들도 과거 속에서 바라보게 해주기 때문에, 마치 낯익은 것처럼 만든다. 이미 많은 이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정리해두었으며, 그래서 내가 모를 뿐이지, 다들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인간이 이해하기 위한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존재함 자체가 그 속성인 곳이다.
그리고 다만, 사람이 이를 관찰한 후, 머리속에 틀을 만들고, 이를 사용해 연역 추론을 하고 있을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 추론이 꽤 쓸만한 것으로 여겨져, 인간이 마치 지구를 이해하고, 지배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조금만더 깊게 들여다보면, 이성이 하는 예측은 현실과 뒤틀려있으며, 맞지 않는다. 세상은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기보다는, 관계에 의해서 변화하고, 그러한 관계의 다양성은 곧바로 예측 불가능성과 혼란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고 있다. 모든 것은 변하고 있고, 변하고 있다는 말마저 변하고 있으며, 변하고 있다는 말만으로는 형용할 수 없도록
변화하고 있다.
Sail On Chaos란 그래서 이 혼돈의 심연을 여행하고 있는 작은 항해다. 이러한 혼돈은 처음에 낯익음 속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크게 확대되서 보이기도 하고, 인간을 심연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그래도 항해는 계속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혼란속에 우리가 구축한 것은 무엇이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알며,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러한 질문을 근원으로 해서 일상생활에서 변형된 얻어낸 여러가지 기록들을 블로그에 담아볼 작정이다.
그럼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