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2.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크리슈 나무르티

2009/09/12

인류는 특별히 생각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게 만드는 철저한 습성인 동물적 본성에서 시작해서는,
마침내 그것을 뛰어넘는 이성을 갖추게 되었지만,
여전히 본성은 이성을 압도하고 있다.

얼마나 압도당하고 있던지, 본성을 자각하여, 그것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수한
이성적 존재란, 인류에게 거의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심지어 그것을 알기 시작한 나도 도저히 그게 불가능해보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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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죄다 인용이다. 반 밖에 아직 안읽었는데 이런 놀라운 혜안이 들어있다!




동물은 쓰다듬어 주는 한 훌륭하게 반응하지만,
적대적인 도발을 당하는 순간 그의 본성의 모든 포악함이 드러난다.


만일 내가 항상 너와 대비해서 저울질하고, 너와 같이 되려고 싸운다면, 나는 내가 나
자신임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하나의 환영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어떤 형태의
비교이든지 간에 그것은 더 큰 망상과 더 큰 불행으로 이끌 뿐이라는 점을 이해했을 때, 다시
말해서 마치 내가 나 자신을 분석하고, 자신에 대한 지식을 조금씩 조금씩 보태고, 혹은 나와
나 바깥의 어떤 것-그것이 국가이든 구세주이든 아니면 이데올로기이든-을 동일시할 때,
그리고 그러한 모든 과정이 오직 더 큰 순응과 따라서 더 큰 갈등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알 때,
나는 그것(비교)을 완전히 버리게 된다.


우리는 모두 이런 형태 혹은 저런 형태의 쾌락을 좇고 있다-지적, 감각적 혹은 문화적 쾌락,
개선의 쾌락, 다른 사람에게 해야 할 것을 말하고, 사회악을 고치고, 좋은 일을 하는 쾌락-더
많은 지식의 쾌락, 더 큰 물질적(육체적) 만족, 더 많은 체험, 삶에 대한 더 많은 이해, 마음의
여러 똑똑하고 영악한 것들-그리고 궁극적인 쾌락은 물론 신을 갖는 것이다.
쾌락은 사회의 구조이다. 어렸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은밀하게, 교묘하게, 또는
드러내 놓고 쾌락을 좇는다.



그렇다면 왜 삶이 쾌락에 의해 이끌려서는 안되느냐고 물을는지 모른다. 그것은 쾌락이 반드시
고통, 좌절, 슬픔과 공포를 가져오고 공포는 폭력을 낳는다는 아주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살고 싶으면, 그렇게 살라. 어떻든 대부분의 세상이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러나
당신이 슬픔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쾌락의 전구조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쾌락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비난하지 않고,
나쁘다거나 좋다고 말하지 않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추구한다면, 눈을 뜨고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즉 항상 쾌락을 찾는 마음은 반드시 그것의 그림자인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 추구하자는 얘기다. 비록 우리가 쾌락을 좇고 고통을 피하려 한다고
하더라도, 그 둘은 떨어질 수 없다


말하자면 승려나 고행자처럼 그걸 끊지 말고, 그게 죄라고 생각하여
여자를 쳐다보지 않으므로써 그들의 이해의 활력을 파괴하는 일은 하지 말고, 쾌락의 전의미를
알 일이다. 그러면 당신은 삶 속에 엄청난 기쁨을 갖게 될 것이다. 당신은 기쁨에 관해 생각할
수 없다. 기쁨은 즉각적인 것이며, 그리고 그걸 생각함으로써 당신은 그걸 쾌락이 되게 한다.
현재에 산다는 것은 아름다움의 즉각적 지각이며, 그것으로부터 쾌락을 찾는 일 없이 그 속에
있는 커다란 기쁨이다.


우리는 언제나 단상에 앉지 않으면 안된다. 속으로 우리는 불행과 비참의
소용돌이이며 그렇기 때문에 바깥으로 대단한 인물로 여겨지는 것은 아주 만족스러운 일이다.
이 지위, 위세, 권력을 얻으려는 갈망, 사회에 의해 뛰어난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갈망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은 바램이며, 이 지배에의 욕구는 공격의 한 형태이다. 자기의
성자다움에 비추어 어떤 지위를 찾는 성자는 농가의 마당에서 부리로 쪼고 있는 닭과
마찬가지로 공격적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공포를 아는가-직업을 잃는 것에 대한 공포, 충분한
음식과 돈을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 이웃과 대중이 당신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성공 못하면 어쩌나, 사회에서의 지위를 잃으면 어쩌나, 조롱당하고 경멸당하면
어쩌나-고통과 병에 대한 공포, 지배에 대한, 사랑이 무언지 모르거나 사랑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내나 아이들을 잃는 것에 대한, 죽음에 대한, 죽음과도 같은 세상에서 사는 것에
대한, 지독한 권태에 대한,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 갖고 있는 이미지에 따라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당신의 신앙을 잃는 것에 대한 공포-이 모든 것과 그외의 수많은
공포들-당신은 당신 자신만의 공포를 아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들 공포에 관해 흔히 무엇을
하는가? 그것들로부터 도망치거나-그렇지 않은가-그것들을 은폐하기 위한 관념들과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않는가? 그러나 공포로부터 도피하는 것은 그것을 증가시키는 것일 따름이다



확실한 것으로부터 불확실한 것에로 가는 운동이 내가 말하는 공포이다.
내가 여기 앉아 있는 지금 이 순간 나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나는 현재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아무 일도 나에게 일어나지 않고 있고, 아무도 나를 위협하지 않으며 나에게서 뭔가를
빼앗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너머에는 마음의 심층이 있어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장차 일어날 일을 생각하고 있는 또 과거의 어떤 것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과거와 미래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것과 즉각적으로 마주칠 때 거기엔 공포가 없다. 생각이 스며들 때에만 공포가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질문은, 마음이 완전히, 전적으로 현재에 살 수 있는가? 이다. 그것은
공포가 없는 마음에게만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려면 당신은 사고, 기억, 시간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걸 이해하는데 있어서 머리로만, 말로만 이해하지 않고
가슴으로, 마음으로, 내장으로 이해할 때, 당신은 공포로부터 자유로와질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마음은 공포를 낳는 법 없이 생각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그걸(공포를) 해소하려 함이 없이, 그것의 반대 즉 용기를 끌어들이는
일 없이 당신의 공포를 볼 수 있는가? 당신이 <나는 그걸 제어해야 해, 나는 그걸 없애야
해, 나는 그걸 이해해야 해>라고 말하면, 당신은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구름, 나무 혹은 강의 움직임들을-이것들이 당신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아주 조용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당신 자신을 바라보는 일은, 그 요구들이
아주 실질적이고, 그 반응이 아주 빠르기 때문에 한결 어렵다.


그러면 우리 속에 있는 모든 형태의 폭력이 완전히 없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이 괴물스럽게
잔인한 세계에서 여전히 살 수 있는지를 같이 생각해 보자. 나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속에 증오, 질투, 불안 또는 공포의 숨결을 갖고 있고 싶지 않다. 이것은 내가 죽고
싶다는 걸 뜻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도 충만하고 풍요하고, 아름다운 이 놀라운 지구 위에서
살고 싶다. 나는 나무, 꽃, 강, 초원, 여자, 소년 소녀들을 보고 싶으며, 동시에 나 자신과
더불어, 세계와 더불어 완전히 평화롭게 살고 싶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만일 우리가 폭력-전쟁, 강탈, 국가적 적대와 계층간의 갈등 등 사회의 외적 폭력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폭력을 보는 법을 안다면, 우리는 그걸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복잡한 문제가 있다. 여러 세기 동안 인간은 폭력적이었다. 세계 어디서나 종교는
그를 길들이려고 했으나 어떤 종교도 성공하지 못했다.


당신이 자신을 인도인이라거나 유럽인이라거나, 혹은 그 어떤 것으로 부를 때 당신은
폭력적이다. 그게 왜 폭력적인지 아는가? 당신이 자신을 그 외의 모든 인류로부터 분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스스로를 신념, 국적, 전통에 의해 분리할 때, 그것은 폭력을 키운다.
그러므로 폭력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날, 어떤 종교, 어떤 정당이나 편파적 조직에도
속해 있지 않다-그는 인류에 대한 전적인 이해에 관심이 있다.


내 피부가 검든 누렇든 희든 자줏빛이든지간에, 한 폭력적 인간인
내가 여기 있다. 나는 이 폭력이 타고 난 것인지 아니면 사회가 내 속에 심어준 것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내 관심의 전부는 다름 아니라 도대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 이상 나에게 중요한 건 없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섹스, 음식, 지위보다 더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건 나를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폭력은 나를 파괴하고 세계를 파괴하며, 그리고 나는 그걸 이해하고 싶고 그걸 넘어서고 싶다.


이러한 이미지들에 기초한 관계는 관계 속에 평화를 가져오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미지는
허구적인 것이기 때문이며 사람은 추상 속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하고 있는 건 이것이다-즉 관념 속에서, 이론 속에서, 상징 속에서 살고 있으며, 우리가 우리
자신과 남들에 관해 만들어낸-따라서 전혀 실재가 아닌-이미지들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모든 관계는, 그것이 재산과의 관계이든 아니면 관념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이든, 근본적으로 이
이미지 형성에 근거해 있으며, 따라서 거기엔 언제나 갈등이 있다.


나는 우리가 이 질문 속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의식의 어느 구석도 갈등으로 물들지 않은 데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관계-그것이 친한
사람과의 관계이든 아니면 이웃이나 사회와의 관계이든-속에는 이 갈등이 있다. 즉 반대, 분열
상태, 분리, 이중성 등의 갈등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사회에 대한 관계를 관찰해 보면 우리는
우리 존재의 모든 차원에 갈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즉 아주 피상적인 대응이나 아니면
황폐한 결과를 가져오는 크고 작은 갈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어떤 것과 비교하고 있다-즉 더 돈 많고 더 훌륭한 사람,
더 머리 좋은 사람, 더 애정 깊고, 더 유명하고, 더 이렇고 더 저렇고... 그 <더>라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을 항상 어떤 것 혹은
어떤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갈등의 주요 원인중의 하나이다.
그러면 도대체 비교라는 건 왜 있는가? 왜 당신은 당신 자신과 다른 것과를 비교하는가?
비교는 어린 시절부터 가르쳐져 왔다. 모든 학교에서 A는 B와 비교되었고, A는 B처럼 되기
위해 그 자신을 파괴했다.

모든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젊은이들은 사회에 저항하며, 그것은 그것 자체로서
좋은 거지만, 그러나 저항은 자유가 아닌데, 왜냐하면 당신이 저항할 때 그것은 하나의
대응이고, 이 대응은 그것 자체의 패턴을 세우며, 그리하여 당신은 그 패턴에 붙잡혀 있는 게
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것이 뭔가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다른 틀 속의 낡은 것이다. 어떤 사회적, 정치적 저항도 결국 무척 낡은 부르좌의 정신상태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당신은 기억으로 가득차고, 제약 투성이이며, 어제의 투덜거림으로 꽉차 있기 때문에 결코
고독하지 않다-당신의 마음은 그것이 축적해온 쓰레기를 깨끗이 비우지 않은 것이다.
고독하려면 당신은 과거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안된다. 당신이 고독할 때, 즉 어떤 가족에도
속해 있지 않고 어떤 나라에도 문화에도, 특별한 대륙에도 속해 있지 않고 완전히 고독할 때,
국외자가 된 느낌이 있게 된다. 이렇게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천진하며, 이 천진성이 마음을
슬픔으로부터 해방한다.


배운다는 것은 시간의 문제인가? 우리는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서로 증오하고 죽이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의 길이 있다는 걸 배우지 못했다.

우리는 산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며, 따라서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모른다, 우리가 삶을 두려워하는 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완전히 불안전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는 안전이 없다는 걸 내적으로, 심리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안전이
없으면 끝없는 운동이 있으며 그래서 삶과 죽음은 같은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 말은 짊어진 게 너무 많고 너무 썩어서 나는 그 말을
선뜻 사용하고 싶지가 않다. 모든 사람이 사랑을 말한다-모든 잡지와 신문 그리고 모든
선교사가 끊임없이 사랑을 말한다. 나는 내 나라를 사랑하고, 나는 나의 왕을 사랑하고, 나는
어떤 책을 사랑하고, 나는 재산을 사랑하고, 나는 쾌락을 사랑하고,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하고,
나는 신을 사랑한다. 사랑은 관념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 좋을대로 기르고, 키우고,
품고, 난폭하게 취급되고, 뒤틀려질 수 있다. 당신이 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상상력을 보호한다는 걸 뜻하며, 당신이 고상하고
신성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의거한 어떤 형태의 존경할 만함을 걸치고 있는 당신 자신을
보호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나는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완전한 넌센스다. 당신이 신을
경배할 때 당신은 자기 자신을 경배하고 있는 것이며-그리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세계 어디에서나, 이른바 신성한 사람들은, 여자를 쳐다보는 것은 완전히 나쁠 것이라는
주장을 견재해왔다. 그들은 만일 당신이 성에 탐닉하면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고 말하며,
그래서 그들은 비록 자기들이 그것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제쳐 놓는다. 그러나
성욕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두 눈을 빼버리고 그들의 혀를 잘라버리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가슴과 마음을 굶주리게
하고 쇠약하게 했다. 그들은 인간을 탈수시켰다. 그들은 아름다움이 여자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인멸했다.

내가 <사랑은 내일도 어제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거나 <아무 중심이 없을 때 사랑이
있다>고 할 때, 그 말은 나에게는 정말이지만 당신에게는 그렇지 않다. 당신은 그걸 인용하고
그걸 어떤 공식으로 만들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타당성이 없다. 당신은 스스로를 위해
그것을 알아야 하며,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보는 자유, 모든 비난, 모든 판단, 모든 동의와
반대로부터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보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중의 하나이며-또는 듣는 것도 그렇다-보는
것과 듣는 것은 같은 것이다. 만일 당신의 눈이 근심걱정으로 눈멀어 있다면, 당신은 황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연과의 접촉을 잃었다. 문명은 점점 대도시를 향해
가고 있다-우리는 점점 더 도시인이 되어 가고 있고, 밀집한 아파트촌에서 살고 있으며, 저녁
하늘이나 아침 하늘을 바라볼 공간조차도 거의 갖고 있지 못하고, 따라서 우리는 상당한
아름다움과의 접촉을 잃고 있다. 우리가 해뜨는 거나 해지는 것, 달빛, 혹은 물 위의 빛의
반사를 얼마나 못 보고 있는가에 대해 당신이 주목해 본 적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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